고교야구 관련으로는 어지간하면 크게 치우치지 않고 글을 쓰려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100% 진흥고 편향입니다.
웃고는 있었어도 마음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떨리는 다리,
힘을 주지도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투구폼,
체념하듯이 몸을 풀고 있다가 부랴부랴 헬멧 쓰고 보호대 착용하고 배트 들고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
땅볼로 물러나고 힘이 든 기색이 역력한데도 모자를 고쳐쓰며 마운드로 올라가는 모습.
감동적인 거 좋지만 솔직히 그런 모습 보고 싶어서 간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굴리고 있는 감독님이 밉지도 않고 그냥 안타까웠을 뿐.
공격이 끝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묵묵히 마운드를 향하는 투수이니 내리지 못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현실이 냉혹한 것도 있지 말입니다. 그 현실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내는게 아니잖아요.
머릿 속으로는 이기기가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고 그저 저런 상태였는데도 용케도 무너지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전 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정영일 선수는 대회 기간 내내 초구 스트라이크만큼은 어지간하면 꼭 잡고 들어갔던 투수였는데 그만큼의 제구도 잡히지 않을만큼 피로한 상태였습니다. 8~9회까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버텼는데 역시 티가 날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런 모습을 보고있기는 힘겨웠습니다. 말 공격만 되면 경남 타순이 어떻다, 제발 치고 끝내줘라. 하고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도 초 공격만 되면 지금은 진흥이 하위타선이어도 다음엔 상위타선이니까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타순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누가 치고, 누가 한 베이스 더 보내주고, 누가 불러들이기만 하면 돼.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사한가봐요.
정말이지 동대문에 야구 보러다니다보니 혹사에 너무 익숙해져 내성이 생겨버렸는지도.
자책도 들지만 다시 그 상황에 돌아가더라도 전 별 다를바 없는 이율배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청룡기 결승전의 정영일에겐 후원회비니 진학이니 하는 어른들의 계산법은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영일은 가끔은 미트에 닿지도 않는 공을 밀어서 던지면서 볼넷 볼넷 안타를 연속 허용하더라도, 끝까지 마운드에 올라서 아웃카운트를 잡아나가던 에이스였을 뿐입니다.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무너졌지만 경기를 끝마치고 동문들에게 답례를 하던 그에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더랬습니다. 실은.
한동안 마운드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모습에 가슴이 시큰거려서 혼났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만큼은 잘 했다고 웃어줬어야 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너무 많이 던졌고 너무 심했으니 웃어야 할 상황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너무 놀라운 모습을 보여줘서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도 투구수 걱정도 계속해서 들었거든요. 새 이닝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선 그걸 지켜서 다음날 재경기 들어가봐야 별 수 없었고 어차피 정영일은 지더라도 아무도 졌다고 생각할 수 없는 선수였죠.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애초에 이기긴 힘들었습니다. 상대는 탄탄하고 기본기가 잘 갖춰진 팀인데다가 진흥고는 별로 그렇지도 않고 더구나 초 공격이었으니까요.
물론 경남고에 비해서 탄탄한 느낌이 덜했을 뿐 진흥 전체적으로는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남고의 수비는 프로 수준을 능가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결승까지 올라오는 데 정영일의 성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선수들도 충분히 잘 했습니다.
제게 있어서 진흥고는 언제나 부실한 내외야 수비로 무너지는 인상이었습니다. 안타를 칠 수 있는 선수는 물론 전혀 생각나지 않고.
늘었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올초 대통령배 1회전 때도 진흥에 대한 생각은 별 차이 없었습니다. 다만 안타를 칠 수 있는 나성범, 나성용 등의 타자들의 이름만 머릿 속에 들어왔을 뿐 전반적인 인상은 그대로였어요.
그러던 선수들이 청룡기에는 가끔 에러를 하기는 하지만 훨씬 안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와서 상대의 에이스를 무너뜨리는 안타도 뻥뻥 쳐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정말 대회가 없었던 기간 동안 열심히 연습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통령배 1회전을 힘겹게 치르면서 많이 성장했겠죠.
내외야 수비가 고질적으로 불안하던 팀에서 나름대로 갖춰져가는 팀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가끔 불안함을 보이곤 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무조건 진흥은 수비가 안된다, 하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슴 아프고, 문득 성장해가는 모습에 기쁘고.
16회까지 진행되던 경기를 보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시상식에 도열해있던 선수들 가운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정영일 선수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안쓰럽고 안타까웠지만 자신이 청룡기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던 선수였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최우수선수는 똑같이 후들거리던 다리로 변화구 제구도 잘 안될 정도로 피로한 상태이면서도 마운드를 지켰던 이상화 선수에게 돌아갔지만, 이상화 선수 뿐만 아니라 정영일 선수도 모두의 마음 속의 최우수선수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푹 쉴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 어깨, 솔직히 혹사엔 많이 무덤덤해진 편이라고는 해도(외려 고등학생 때는 어느 정도 혹사도 겪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어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Posted by 채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