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이거즈는.... - 2006/10/03 03:05
홀가분해지지 못했습니다.
올 시즌 페넌트 레이스의 마지막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미명 아래, 가을 잔치에 대한 일말의 집착을 숨기지 못하고 야구장에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혹사를 싫어한다지만 겨우 그 정도의 팬입니다.
이상화가 강판될 때부터 전 부루퉁했습니다.
투수 코치에게 공을 건네주는 태도가 전혀 불퉁하지 않고 담담한 이상화가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당신은 어쩌다가 바보같이 그런 것에 초연해진 겁니까.
일찍 내려가는 것보다 그의 그런 모습이 참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이상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야 하는 타이거즈가 싫었습니다. 투수는 섬세한 족속이라잖아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요?
우리에겐 중요한 경기지만 중계는 없습니다. 자력으로 4강 진출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시즌 마지막 중요한 경기를 어떻게든 보기 위해 구름관중이 모였습니다. 운동장 앞 암표 아줌마는 족발 등을 사야 암표도 판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불과 어제까지도 없던 일입니다. 90년대까지나 있었을법한 일들. 팬들의 관심은 그렇게나 뜨거웠습니다. 그렇게 기대감이 몽글몽글 모여있는 가운데 맞아나가는 타구가 번번히 워닝 트랙에서 잡히는 건 불안한 일이었겠지요.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상화에게 쏟아지는 갈채와 그를 토닥여주는 동료들의 손길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윤석민은 구속이 줄어들었습니다.
그의 140은 슬라이더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더랍니다. 얼마전까지 150을 던지던 녀석인데 말입니다. 구속이 전부는 아니니 공의 체감을 이야기하지요. 맞으면 그대로 넘어갈만큼 가볍습니다.
윤석민이 먼저 올라왔다는 건 다행히도 신용운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기야 그는 어제 6이닝을 던졌습니다. 한 경기에서만 던진 것도 아니고 몇 시간의 텀을 두고 두 경기를 뛰었지요. 일찌감치 빨간 겉옷을 껴입고 불펜에서 몸을 푸는 투수들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약간 안도했습니다. 그나마 그가 또 나오지 않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요.
이렇게 하나가 덜 혹사 당한다는 것에 안심을 하는 것도 참 못된 마음입니다. 윤석민의 허전한 얼굴 표정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캠코더의 16x 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올 시즌 40경기 넘게 현장에서 본 언니는 그런 얼굴을 하는 윤석민은 처음 봤답니다.
미안해, 신용운이나 한기주만큼 널 좋아하지 못해서 정말정말 미안해. 그치만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은 보기 힘들더라.
한 점은 어렵게 얻어도 한 점은 쉽게 내주는 것이 약팀의 모습입니다.
더블 헤더에서도 쉴 수 없는 팀 사정에 지친 김상훈을 원망할 수도 없고 타자 앞에서 불규칙 바운드가 되는 맥없는 공을 던진 윤석민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뒷자리에선 포수 쟤 뭐야 하고 새된 목소리로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건 그 아가씨도 저도 잘 알았습니다. 김상훈은 타석에서라도 만회하려고 열심히 뛰었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8회에 한기주가 올라오는데 말입니다.
광주에서 야구를 보는 건 요 근래의 일인데, 그 아이의 자리가 얼마나 커져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겐 그냥 못하면 까이고 한없이 속상하게 만들던 한기주일 뿐인데 홈 팬들에겐 그렇지 않았어요. 올라오면 막아낼 것이라는 신뢰감을 주는 투수 한기주입니다. 나름대로 팬이라고 자부해오며 꼭 잘할 거라고 믿었지만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어리벙벙합니다. 더블 헤더 2차전에서 기주가 마운드에서 내려갈 때 '내일도 나올라면 힘내야제~' 정도의 믿음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외침까지 나왔죠. (일요일 두 경기 다 나오고 월요일에 또 나오는건 혹사라는 걸 알아도 그게 당연할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으니 그렇게 외친 아저씨께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한기주는 너무 잘 합니다.) 구속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어쨌거나 잘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녀석이 팬들에게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느낀 게, 경기가 끝나고 응원단장 아저씨가 기주에게 마이크를 건넸을 때인데요. 뭐라고 멘트를 짤막하게 하니 우레와 같은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객석에 사인볼을 던질 때 김진우도 나름대로 멘트를 했는데 팬들의 환호의 크기가 한기주와 비교되지 않더군요. 자업자득이겠지만 누가 더 사랑을 받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몰랐는데 한기주가 지금 타이거즈의 에이스입니다.
전 그저 김진우가 팀의 에이스로 나서고 한기주는 형님들이 씌워주는 우산 아래서 차근차근 성장하길 바랐을 뿐인데 말이에요. 자칭 팬이라면서도 기대치가 너무 보잘 것 없었나, 혹은 선수를 전혀 볼 줄 몰랐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 후반 종범성이 천금같은 찬스를 날려먹었지만 그의 타석에 모두가 보내던 그 성원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저는 그게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같이 본 모 언니는 집착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다 맞을 겁니다. 어쨌거나 전율이 일어날 상황이지만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장면이겠지요.
이용규도 이쁜 짓만 골라하면서 잘 하고 있다지만 앞으로 이런 정도의 성원을 불러일으키는 선수가 이종범 외에 몇이나 나올까나요. 정말 그는 레전드입니다.
내내 시큰둥해 있었으면서도 10회 김원섭의 끝내기 안타가 터져나왔을 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뭡니까, 이 남자. 지병도 있고 연일 나와서 몸이 많이 안 좋을텐데. 어제도 몸 바스라지도록 뛰겠습니다 하더니 결국 해내더군요.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허투루 뱉는 법이 없는 실속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칠 기회가 조금은 더 주어졌어도 잘했을텐데 두 번이나 번트를 지시한 감독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기대를 내심 했지만 1군에서 어떻게든 자리가 생길거라고만 했지 붙박이 주전급의 단단한 자리를 구축해가며 고비 때마다 잘해주는 정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극적인 승리 이후 선수들은 떠들썩했고 폭죽이 연신 터졌습니다.
종범성이 찬스를 날리고 꽤 많은 관중이 빠져나갔지만 야구장에는 여전히 수천의 관중이 남아서 선수들과 기쁨을 함께 했습니다.
먼데서도 김상훈이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폭투를 블로킹하지 못해서 한 점을 내주었다는 마음의 부담을 덜은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습니다.
후에 언니가 찍은 영상을 돌려서보다가 알게된건데, 그때 신용운이 한기주를 뒤에서 한 팔로 꼭 안아줬습니다. 윤석민도 애정어린 손길로 토닥여줬고요. 자기도 고생 많이 했으면서 한기주, 윤석민 두 후배가 고생 많이 했다고 챙기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이후엔 한기주가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맨 앞줄에 서도록 떠밀어줬더군요. 그래야 한기주가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테니까요.
마음 씀씀이까지 아름다워 좋아한다는 걸 행복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서 신용운이 더욱 좋습니다. 부디 신군을 오래오래 응원할 수 있길.
이겼어도 찜찜한 경기였습니다.
신용운은 나오지 않았지만 윤석민, 한기주는 여전히 연투를 하며 예전만 못한 구위를 보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아름다움과 이기심을 이야기했지만(살을 붙여서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는데 맘대로 안되는 상황입니다-ㅅ-) 경기를 보는 내내 저야말로 아름다움과 이기심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해답을 얻었냐고 모두에게 물었지만 저도 아직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간극은 있다고 했지만 '승리는 좋은 것이다'와 '모두가 좋아하지 않으니 혹사는 나쁜 것이다' 둘다 맞는 명제니까요.
어린 투수들이 나오고 또 나오는 정황이 밉고 또 밉지만 어느새 저는 준플레이오프 일정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대전 원정은 힘들더라도 2차전은 갈 것 같습니다.
블로그는 곧 다시 열겠습니다.
